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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akae Tōju (中江 藤樹, 21 April 1608 – 11 October 1648) was a writer and Confucian scholar of early Edo period Japan popularly known as "the Sage of Ōmi". (en)
- 中江 藤樹(なかえ とうじゅ、1608年4月21日(慶長13年3月7日) - 1648年10月11日(慶安元年8月25日))は、近江国(滋賀県)出身の江戸時代初期の陽明学者。近江聖人と称えられた。諱は原(はじめ)、字は惟命(これなが)、通称は与右衛門、藤樹と号した。 (ja)
- Tōju Nakae (jap. 中江藤樹 Nakae Tōju; ur. 1608, zm. 1648) – japoński filozof neokonfucjański okresu Edo. (pl)
- 中江藤树(日语:中江 藤樹/なかえ とうじゅ Nakae Tōju,1608年-1648年),日本江户时代初期的儒家学者、教育家。他被认为是日本阳明学的开山鼻祖。也被后世尊称为近江圣人。 生于近江国(今滋贺县高岛郡安昙川町字上小川)。他与弟子熊泽蕃山创立了独具特色的阳明学道德理论。 (zh)
- Nakae Tōju (21 de abril de 1608 - 11 de octubre de 1648) fue un filósofo confuciano japonés conocido como "el sabio de Ōmi". Nakae era un siervo que vivió durante el shogunato Tokugawa. Enseñaba que la más alta virtud era la piedad filial (kō), y actuó según este principio; así, en 1634 dejó un puesto oficial para regresar a su hogar en Takashima, Ōmi, para cuidar a su madre. (es)
- Nakae Tōju (中江 藤樹), 21 avril 1608 – 11 octobre 1648, est un philosophe confucéen japonais surnommé « le sage d'Ōmi ». Nakae est un obligé féodal de l'époque du shogunat Tokugawa. Il enseigne que la plus haute des vertus est la piété filiale (kō), leçon qu'il met en pratique lorsqu'il abandonne son poste officiel en 1634 afin de retourner chez lui dans le village de Takashima, dans la province d'Ōmi prendre soin de sa mère. Il fait cependant une distinction entre le sho-kō et le dai-kō : moindre et plus grande piété filiale. Le sho-kō implique les soins normaux dus par les enfants à leurs parents; le dai-kō implique la notion que nos parents humains sont eux-mêmes les enfants de parents divins - ainsi, si ses parents ont tort, on doit alors les inciter à revenir à la vertu. (fr)
- 나카에 도주(中江藤樹, なかえ とうじゅ, 1608년 4월 21일 ~ 1648년 10월 11일)는 일본의 철학자다. 일본 양명학의 시조이다. 평소 등나무(藤樹) 아래에서 강학하였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를 ‘도주 선생’이라 불렀다. 청년 시절에 도주는 하야시 라잔의 문하에서 정주학을 배웠으며, 33세가 되던 해에 우연히 《왕용계어록(王龍溪語錄)》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용계의 어록에 불교의 말들이 섞여 있고 그 견해가 선학(禪學)에 가깝다고 여겨, 그것에 대해 시종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그러나 37세 되던 해 《왕양명전집》을 구해 여러 번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인의 일관된 학문은 태허(太虛)를 체(體)로 삼으니, 이단(異端)과 외도(外道)가 모두 내 안에 있다. 내가 어찌 말이 같다고 꺼리겠는가”(〈藤樹先生行狀〉) “치지격물(致知格物)의 학문이 비록 새롭다고 하지만 해가 거듭하여도 참뜻을 밝힐 수 없구나. 하늘이 도와서 밝은 세계로 돌아와 태평함에 이르렀으니, 오늘 아침 내 마음에는 새 봄이 찾아 온 듯하구나.”(〈藤樹先生遺稿〉) 이로부터 도주는 완전히 양명학에 귀의하였다. 그러나 도주는 양명학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구애됨 없이 다른 여러 학파의 장점도 받아들였다. 그는 이 토대 위에서 자신의 독특한 사상 체계인 도‘주학’을 건립하였고, 나아가서는 일본 양명학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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